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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클림트에 대한 개인을 더 들어가 볼게요.
클림트는 알려진 것만 해도 14명 이상의 자식들을 낳았습니다. 그런데 클림트는 일기를 쓰지 않았다고 해요.
자신의 사생활을 별로 노출하고 싶지 않아서였습니다.
또 다른 얘기로는 보헤미안 스타일의 예술가였기 때문에 자유주의자처럼 사는데 일기의 기록은 필요 없었다고도
하죠.
그만큼 클림트는 당시에 센세이션을 일으킨 진정한 시대의 인기남이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가장 중요한 인물이라고 꼽자면 단연 에밀리입니다.
에밀리 플뢰게,
둘은 1891년 클림트의 동생 에른스트와 에밀리의 언니가 결혼하면서 사돈 지간이 되었죠.
클림트는 에밀리보다 12살 연상이었는데 그녀를 아껴주었고, 후견인을 자청할 정도였습니다.
1908년작, 클림트의 가장 유명한 작품 "키스"는 에밀리와의 열정적 순간이라고 합니다.
사실 클림트를 떠올릴 때 키스가 빠질 수 없죠.
클림트 하면, 그 유명한 '우먼 인 골드'입니다. 여성과 금처럼 잘 어울리는 게 있을까요?
금빛 초상화가 많기 때문에 복사본 그림도 전 세계적으로 잘 팔립니다.
클림트의 그림들은 워낙 인기가 높아,
스마트폰 케이스로도 클림트의 작품들은 많이 쓰이는군요.
‘리제르 양의 초상’(Portrait of Frulein Lieser, 1917)은 클림트의 유작이나 다름없는데요.
이 작품이 바로 영원히 찾지 못할 줄 알았었는데 100년 만에 등장했습니다.
정확히는 99년 만에 발견된 거죠.
하지만 이 작품은 미완성이었을까요?
클림트의 서명이 없는 게 이 작품의 특징입니다.
하지만, 이 작품이 클림트의 것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습니다. 작품을 그러고 나서 세상을 뜨고 10년째 되는 해인
1926년 5월, 오스트리아 노이에 갤러리에서 전시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클림트는 보헤미안 스타일의 자유주의자였지만, 실제 그의 스타일은 완벽주의 그 자체였는데요.
이 그림을 위한 밑 스케치 25장의 습작품이 남아 있습니다.
이전의 작품들이 화려한 금빛, 은빛 장식이었다면 이 작품은 평소 클림트가 심취한 공예와 관련된 색을 많이 사용한 게 큰 특징입니다.
정면을 바라보는 포즈도 클림트스럽지 않다는 구도죠.
마치 정면을 바라보는 전신 초상화 느낌인데 클림트는 보통 삐딱한 구도를 선호했었습니다.
밖의 배경은 불은 다홍이며, 뺨 역시 붉게 색조화장을 했죠. 붉은색과 푸른색의 절묘한 드레스의 보색 대비.
머리색도 푸르게 장식하여 푸른 색조를 유감없이 보여줬습니다.
빈의 부유한 방직공장의 딸, 리제르가 실제로 저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는 것은 누가 봐도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이 초상화는 클림트의 말년 초상화라고 부릅니다.
클림트의 초창기에는 없던 파스텔 색들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클림트는 금빛과 은빛, 다홍빛처럼 화려하다 못해 관능적이고 퇴폐미까지 넘친,
당시로는 파격 그 자체의 드레스를 입은 여성의 초상화로 유명했었습니다.
그런데 100여년 전의 파스텔 톤 색까지..
그야말로 클림트는 천재 화가이자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키는 색의 마법사로 불러도 손색이 없습니다.
이 드레스를 만들어야 했던 클림트의 여인,
에밀리는 이 디자인을 패턴에 반영했고 상당히 어려운 작업이었기 때문에
클림트와 에밀리, 이 둘 간의 끈끈한 애정 없이는 불가능했었죠.
한편, 에밀리는 오스트리아 빈에서 패션 살롱을 열면서 주위의 인사들과 교류를 통해 사업을 확장했는데요.
이때 가브리엘 코코 샤넬, 크리스천 디올 같은 디자이너로부터 영감도 많이 받게 됩니다.
여성 패션을 해방시킨 가브리엘 샤넬,
보육원에서 자란 후 그곳에서 배운 기술로 재봉사로 일하면서도 무도회장 연주자의 꿈을 가졌습니다. 결국 ‘코코’라는 이름으로 카페에서 노래하는 가수가 됐죠. 이때의 별명 ‘코코’는 샤넬의 로고가 되었습니다.
상류사회에 진입한 후 본격적으로 모자를 만들고 의상실을 운영하며 디자이너의 꿈을 키운 그녀. 스커트만 입던 복식 스타일이 시대에 맞지 않다고 판단해 남성복으로부터 영감을 얻어 여성복을 뜯어고친 20세기 패션의 선구자였죠.
이 진보적인 디자이너, 그리고 디올 역시 빼어난 프랑스의 디자이너였습니다.
이 둘의 작품은 지금 명품 브랜드가 되었다는게 신기합니다.
이 둘과의 관계처럼, 클림트의 작품이 에밀리의 드레스로 연결되어 시중에 팔려나갔죠.
클림트가 사망할 때 그의 유산의 절반은 에밀리에게 달라는 유언을 합니다.
나중에 에밀리 역시 숨을 거둘때 에밀리의 남편이 소장하고 있던 클림트의 작품들을 오스트리아 미술관에 기증해달라고 하죠.
둘은 정말 보기드문, 결혼은 하지 않은, 동반자였다는게 100여 년전의 신비로 볼 수 있을 겁니다.